[후아유] 프리보드 (2003)

프리보드 (Free Board)
Written by 후아유 Whoau
Publication date : 2003.11.02 (초판) | 2006.04.30 (2판)
Book spec: 1권 완결 | 365p | 신국판
■Character  | 강우현 (攻), 황인형 (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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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를 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들춰보았기에 리뷰.

2003년 발행된 정말 고전인 작품으로, 소설의 배경은 2002년. 확실히 2000년대 초반 감성이 가득한 글이다.

당시에는 꽤 흔했던 가벼운 문체지만, 한창 입문 시기가 이때여서 그런지 아직도 술술 잘 읽힌다.

 

한창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가 배경이라 주제 역시 넷 관련으로, 인디 펑크락 밴드의 팬 사이트에서 부운영자인 주인수 황인형과 악플러인 주인공 강우현. 이 둘은 사이트 내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는데, 감정이 극으로 치달을 무렵, 팬 카페의 정모가 열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된다.

보통 그러하듯 넷상의 모습과 현실이 다를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에서도 그대로인 성격이었던 둘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티격태격하게 된다. 그러다 연애하게 되는 내용.

이 작품이 재밌는 점은, 정모에 벼르고 나온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되어 초반에는 주인공의 들쑥날쑥하고 가볍기 그지없는 감정에 이게 뭐야 하다가도 엄청나게 빠른 전개와 묘하게 매력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분명 문체는 유치한데도. 중반부터는 시점이 조금씩 번갈아 나오기도 한다.

 

팬카페의 부운영자인 황인형이 21살인데, 그런 황인형에게 매번 공격적인 댓글로 싸움을 거는 주인공 강우현은 사실 18살 고2라는 설정도 꽤 재미있다. 실제 만나고 주인공이 동갑이라고 속이며 수를 쥐락펴락하는데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어찌어찌 눈맞고 배 맞고 여차여차 사귀고 나서야 수가 공의 실제 나이를 알고 분노하지만 이미 좋아하는 감정은 깊고 어딘가 여전히 멋있고 귀여운 공 때문에 봐주는. 이런 가벼운 분위기.

사실 초반의 게시판 싸움은 중2병 같은 허세 느낌에 살짝 밍구스러워 스킵하게 되지만, 작품이 당시에도 그렇고 나름대로 인기가 있던 이유가, 지금 봐도 이상하지 않은 끈적한 씬들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강하다고 느끼기 쉽지 않은 고수위 작품이 많은 요즘에 봐도 이 작품은 에로도가 높다.

씬이 무척 많은데, 너무 많아도 질리지만, 문장이 그렇게 세련된 느낌이 아닌 이 소설은 이상하게 찰지다.

어딘가 분위기 있는 B급 에로 영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특유의 투박한 느낌으로 이루어진 질척한 장면들이 꽤 맛깔 난다. 공이 수의 유ㄷ에 집착하는 것이나, 적나라한 음담패설도 강하고. 게다가 배틀홈오 수준으로 주인공수가 만나기만 하면 C가 잔뜩 들어간 욕설로 가득한 말을 해대는데, 그러면서도 좋다고 들러붙고. 아무튼, 애들이 되게 독특하다.

초, 중반까지는 그냥 그 나이가 대부분 그렇듯 넘치는 욕구에 충실해서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짓만 하는 남자애들인 분위기로 흘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먹먹한 감정이 드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바텀인 것에 수치심을 느끼던 수가 주인공의 어떤 행동에 충격을 받고 헤어짐을 고하면서 갈등 구조가 생기는데, 이 시점부터 현실적인 문제들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이는 주인수가 군대에 입대하는 부분과 10년 뒤 대기업에 입사한 주인공과 임용을 패스 후 선생이 된 주인수가 각자 집안과 결혼 문제 등 난관들이 생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보통 이런 문제에서 주인공수의 고민이나 대처는 이 동네 장르에서는 의외로 흔하지 않은 패턴을 보여준다.

결혼의 압박에 시원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가면서도 수에게 고하지도, 그렇다고 놔주지도 못하는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이 안 보이는 곳에서 그가 모르게 힘겹게 버텨왔던 주인수.

 

서로의 현실을 감추고 있다가 드러내게 되었을 때, 자신의 이기심을 깨달은 주인공과 처음으로 냉정해진 주인수의 모습은 초반의 가벼운 스무 살 커플 때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라 이질감도 들지만, 10년 후라는 점이 또 현실적으로 느껴져 수긍하게 된다.

뭐 결국 여차저차 잘 풀리고 둘은 행복해지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의 가족들에게 쉽게 이해받을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후반 외전들이 초반 분위기와 비교해서 상당히 고퀄리티의 감정선이 느껴지는 챕터들이라 이 작품은 정말 미묘한 느낌. 그럼에도 에로씬들은 초반이나 외전이나 많은 것도 신기함.

사실 예전에 지인이 [이거 야해요] 라고 추천해서 샀던 건데, 감정선이 좋아서 놀랐던 기억도 난다.

내 기준이지만 내용이 떡집 수준이라도 감정만 잘 들어가 있으면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하지만 역시 클리셰에서 자유로웠던 시절의 작품이라 그런지 단 한 번의 리버스가 들어 있는 점이 단점.

되려 요즘이 이런 소재에 까다로워졌을 뿐, 확실히 이 무렵의 작품들은 리버스에 관대했던 것 같다. 은근 들어있다니까….

 

그나저나 신간조차 도 낙장과 벌어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최근을 생각하면, 아직까지 약간의 벌어짐조차 없는 책 상태를 자랑하는 10여 년 전 발행 책들이 꽤 튼튼한 제본이었구나 싶다. 떡 제본이라도 인쇄소들이 예전처럼 풀을 양껏 써줬으면 좋겠다는 사족 감상으로 마무리.

 

처음으로 잡게 된 손.
다른 커플들처럼 쉽게 내밀 수 없는 손.
수많은 생각과 많은 갈등 끝에 내밀어진 손.
'좋아, 가보자.' 라고 생각했다.

 

01
나는 우현의 손을 힘 있게 잡으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 해 나갔다. 밤바람의 냄새를 기억하고,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고, 이 밤의 여운을 기억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씨발, 그래 가자. 까짓것.' 우현이 그런 나에게 청량하게 웃어 보이며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략)

"황인형. 나는 네가 좋아."
"...뭐?"
"너랑 항상 이렇게 걷고 싶었어. 그러니까, 오늘만 참아봐."
"지랄, 허세 부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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