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페일] 훼손 (2007)

훼손
Written by 리페일 leefail
Publication date :2007.06.24 (초판) | 2008.07.13 (2판) | 2011.02.21 (3판)| 2015.05.23 (4판)
Book spec: 1권 완결 | 402p | 신국판
■Character  | 성태한 (30-34세,攻), 성여민 (15-19세,受)

열다섯 어린 나이에 사람을 찌르며 인간성을 상실한 채 서른 해를 살아온 성태한. 그는 검찰의 수사망을 피해 은거하던 깊은 숲 자락의 사찰에서 세상과 한 걸음도 닿지 않은 열 다섯의 동자승 여민을 만나게 된다. 

성태한은 무결한 여민을 보며 박탈감을 느끼고, 그의 순수함을 훼손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며 여민에게 정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이 '강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여민은 그 자체가 호감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민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깨운 태한은 절을 떠나고, 여민은 성태한이 자신에게 한 짓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도 모른 채, 마냥 그를 그리워하며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던 사찰에서 내려와 태한을 찾아다닌다. 

어느 날,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등지고 온 동자승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던 태한은 서울 한복판에서 자신을 찾아 다니는 여민과 재회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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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판 인쇄가 훼손 시리즈의 마지막 재인쇄라길래 미루던 리뷰 작성. 단권인데 사진은 초판과 4판으로 나란히.

2007년 초판은 표지 제목이 양각처리 되어있는데, 재판본부터는 종이 재질 변경과 함께 글씨가 볼록한 게 사라진 듯. 인쇄 폰트나 편집도 초판과는 약간 다르다. 4판에는 작가님의 마지막 후기가 추가되어있다. 책 사양은 이렇고..

 

시리즈 중에 성태한 시점으로 진행되는 본편과 외전들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외전들과 리뷰를 별도로 쓸 수밖에 없을 만큼, 본편은 심각한 분위기에 감상도 다름.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 성태한을 알게 해 준 작품. 내가 정말 시주님의 왕 팬입니다.

 

처음 나왔을 당시에 소재도 꽤 파격적이라 연재분을 보면서도 꽤 기가 빨렸었다.

열 다섯이란 나이 차이에 조폭 깡패와 동자승이라니... 당시에 주인공인 성태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꽤 신선했었다.

그래서인지 건조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기도 하고. 주인공 감정 흐름으로 읽다 보면 입이 바짝 마른다.

 

처음 읽으면 정말 기운이 허해지는 작품이지만 재탕하면 할수록, 내가 나이를 먹고 다시 들춰볼수록, 둘의 밀당에 혀를 차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본편도 달달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작품. 신기하게도.

이래서야 어디 가서 훼손 본편이 좀 피폐하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근래에는 그냥 달달물같아서..

그리고 본편은 감정 흐름이나 짜임새가 정말 탄탄해서 언제봐도 가장 좋다.

 

주인공인 성태한. 통칭 '시주님'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동자승 여민을 보면서, 그 나이였을 때의 자신과 겹쳐보게 된다. 

살기 위해 더러운 짓도 마다치 않았던 자신과 깨끗한 여민의 격차에 상대적인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고 더럽히고 훼손시키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을 각인시키고 잊지 말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건드려놓고 떠나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인데..

초반에는 너 이놈 왜이러세요.... 하고 보다가도 너무 순수하기 짝이 없는 여민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그 맘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좀 복잡했다. 재회 후에도, 자신 역시 그리워했으면서 다시 손을 뻗을 용기가 없어서 여민이를 말로 괴롭히고 방치하고.. 그러면서도 여민이를 잡고 싶어 하는 괴로움이 느껴져서 어딘가 애틋한 주인공이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인텔리 조폭에다 후에는 업종도 변경하고 건설회사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지만 근본적으로 성정은 거칠고 무섭다. 과묵하고 냉소적이다 보니 애정표현을 못해서 여민에게 자주 오해의 여지를 준다.

다른 일에서는 어떤 더러운 짓을 해도 거리낌이 없으면서, 어린 여민에게 자신이 집착하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갖는 것에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방황한다. 한마디로 그냥 여민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서 손대는 것도 아까워 죽으려고 하는 그런 주인공. 

말은 거친데 행동은 미친 듯이 다정하다. 게다가 본편에서는 거의 내내 여민에게 존댓 말을 쓰는데 그 때문인지 분위기가 되게 금욕적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능욕을 안 하는 것도 아니어서 배덕 감도 쩔고.

 

주인수인 여민이는 순수함으로 표현되지만... 순수로 잘 포장된 여우 같다.

예전에 처음 봤을 때는 백치 같이 아방하고 유약한 느낌이었는데.. 역시 시간의 흐름과 재탕을 반복할수록 여민이가 이 동네 최고 여우구나 싶다. 나쁜 말은 하나도 안 쓰고, 시주님 좋아요. 시주님 미워요. 시주님 사랑해요. 시주님은 못됐어요의 반복으로 성태한을 들었다 놨다 한다.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어리광으로 결국 태한이 모든 걸 다 해주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구석이 없다 애가. 

순수하다보니 솔직함이 최대 무기랄까. 질투가 나면 누구랑 있지 마요 나만 좋아해요. 속상해요 미워요 이래가면서 전부 말하는 스타일인데 작가님 말대로 성태한을 잔망스럽게 조련하는 스킬이 굉장하다.

 

불자 출신으로 물욕만 없을 뿐, 성태한에 대한 욕심만큼은 넘쳐서 숨기질 못한다. 세상이 시주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시주님만 좋으면 나는 다 상관없어하는 타입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주제에 차에서 하는 게 좋다는 말은 잘도 한다. 한 마디로 정말 귀엽다.

 

훼손의 명대사는 사실 발췌 따기엔 좀 그렇지만... '시주님, 절 XX해주세요' 인데..

노골적인 문장이지만 여민이 태한에게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단어를 'xx'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저 말의 뜻은 단순하게 '절 사랑해주세요' 와 같다. 

태한은 여민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강한 단어를 알려주고 떠났다. 뜻을 알게 되면 자신을 못 잊고 증오하게 될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재회한 여민은 태한의 생각보다 더 강한 순애보를 가지고 있었고, 지순한 사랑으로 태한의 인간적인 면을 자꾸만 깨우치게 한다.

 

이렇다 보니 내용 흐름은 태한의 번뇌가 한 가득이다. 

순수한 여민을 갖고 싶고 자신으로 더럽히고 싶기도 하면서도 자신처럼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는 태한의 감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여민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나서서 죽음을 불사하는 장면은 영화 레옹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러운 인생 속에서 단 하나의 순수를 알게 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뭐 그런 거. 순정 마초가 따로 없다.

본편은 작품 특유의 분위기가 참 좋다. 작가님 초기 작품이라 그런지 상당히 공들인 느낌이 가득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무덤 목록 1순위 작품.

 

나와 여민의 매개는 훼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훼손 시켰다.
나는 나의 불결로 여민의 순결을 훼손했고,
여민은 여민의 순결로 나의 불결을 훼손했다.
우리는 훼손 시킴으로 서로를 얻은 것이다.

 

01
시주님은 일곱 걸음이고 저는 열 걸음 이에요.짧은 거리인데 떨어져 있어서 답답해요. 들리지도 않는데 귀 기울이게 돼요. 뭐하고 계신지 듣고 싶고 가서 보고 싶고 궁금해서 답답하고 초조하고 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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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조금 더 깨끗하게 살았어야 했다. 정직하게 살았어야 했다.
삶의 가속도에 떠밀렸다는 변명 따위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여민을 만나고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 내 인생을 후회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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