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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봄愛 물들다
Written by 채팔이
Publication date : 2012.06.24 (초판) / 2015.12.27 (2판)
Book spec: 1~2권 완결 | 301p / 304p | 국판
■Character  | 현공현 (22→32세, 攻), 심청순 (22→32세,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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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를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을 타기 위한 빠듯한 대학생활에 잠조차 편하게 잘 수 없는 고학생 심청순. 어느 날, 일하는 편의 점에 지갑을 두고간 손님에게 지갑을 찾아주게 되고, 그렇게 지갑의 주인이자 같은 대학 피아노과의 학생 현공현과 만나게 된다. 피아노과의 바람둥이지만 천재이자 재벌로 유명한 현공현. 여유로운 자의 변덕인지 호기심인지 몰라도 청순에게 어쩐지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쩌다보니 피아노 레슨을 핑계로 매일 하루에 한시간씩 만남을 갖게 되지만, 빠듯한 청순의 삶속에 현공현의 존재는 점점 커지고 결국 사랑이 된다. 단 하루, 체온을 나누었지만 공현은 사라져버리고 그렇게 갈 곳을 잃은 청순의 마음은 그 시간에 멈춰버린다. 그리고10년 후, 호텔리어가 된 심청순은 그가 근무하는 대형 호텔 체인의 새로운 사장으로서 나타난 한공현과 재회하게 되는데..


오랜만에 재탕한 기념 리뷰. 

내 기준, 채팔이님의 작품 중에 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글인데도 주인공수의 케미가 느껴지는 점이나 담담한 문체가 좋아서 애틋한 감상을 느끼고 싶을 때 종종 들춰 보는 책.

 

-내 주머니에 방부제가 들어있는데, 자꾸 뜯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다. 

주인수 심청순. 친구들에게는 심청이라고 불리고, 공현에게는 청승이라는 애칭으로 불림. 부모님의 흔적이 남은 것은 푸를 '청'에 대나무 '순'이라는 이름 뿐. 22살 심청순은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삶에 치여 여유 하나 없지만, 마음 역시 막을 수가 없어서 사랑에 빠진다. 

그럼에도 질척하거나 미련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속으로는 애절해도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않고 무심하고 담백하게 행동하는 점도 좋다. 스물 둘의 심청순은 처연한 느낌이 강하지만, 32살의 심청순은 프로페셔널한 호텔리어로서 반듯하고 차분한 느낌. 이름 때문인지 청아한 느낌도 나고. 

 

-나 따위가 뭐라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탐색하려 하지도 말고, 저절로 흘러가게 그냥 둬. 

주인공 현공현. 22살의 현공현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는 피아노과 카사노바. 피아노 전공답게 손이 예쁨. 

천재적인 재능에 외모와 재력까지 가진 게 너무 많음에도 어딘가 공허함을 품고 있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감정에 냉소적이고 알쏭달쏭하게 행동한다. 스물 둘의 현공현은 어딘가 한량같아보였다면, 32살의 현공현은 젊은 사장으로서의 추진력과 열정적인 면이 느껴진다. 

뭐 그래도10년 전이나 후나 현공현은 나른하게 멋있는 느낌.

 

작품의 제목은 이야기의 각 챕터들인데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 '어쩌면' 

대학 시절의 이야기로 가난한 고학생인 심청순의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외사랑을 하는 입장에서 이야기가 흘러 그에 이입할 수밖에 없는 데다 자신의 심정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데서 찌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대학 시절은 청순의 시각과 감정으로만 투영되는 현공현이기에, 애매하게 구는 그의 행동들이 살짝 답답할 수도있고 얘 뭐야? 싶기도 하다. 

반대로 또 묘하게 알기 쉬운 현공현의 행동과 말들을 너무 자조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심청순에게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지갑 찾아준 거 가지고 보답하겠다고 찾아오거나, 툭하면 담배니 콘ㄷ이니, 굳이 청순이 알바하는 편의점에서 사는 거나. 음악에 무지한 애를 붙잡고 피아노 가르쳐 주겠다며 매일 만나자는 것이나.이제 그만하자니까 그러지 말고 서로 하루에 30분, 한 시간씩만이라도 만나자고 붙잡는거나...

짝사랑이라 믿는 청순의 시각으로 읽혀서 그랬을 뿐, 아무리 봐도 현공현의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공현이나 청순의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들도 그렇고 감정은 넘치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둘의 고민이 잘 보이고

사랑에 올인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높은 22살 어린 청춘들이라는 점이 잘 그려졌다는 생각.

 

연주를 들으면서 복도에서 자는 내가 청승을 떤 건 맞았다. 
그런데도 청승아, 라고 부른 웃음기 띤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주한 곡..... 처음 듣는데."

(중략)

"Je te veux"
쥬뜨부. 현공현의 입에서 바람이 흩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난 널 원해."
이윽고 이어진 그의 말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 사이의 주제처럼 자주 등장하는 사티의 음악. 쥬뜨부.

6개월의 짧은 만남으로 에릭 사티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 된 수잔 발라동을 위한 곡으로, 3개월의 만남과 열병 같은 사랑으로 10년을 앓은 둘도 음악에 담긴 이야기와 같다.

 

고작 사랑으로 치부했고 고작 사랑인데도 벗어나지를 못한 스물 둘 청춘의 마지막이었던 비 오는 날 피아노 실 장면은 그냥 마음이 아픔. 어떤 의미로 공현이나 청순이나 모두 서로에게서 도망친 듯한 느낌이었고.


2부 '봄愛' 

10년이 지나 호텔 레드포드의 신임 사장과 엘리트 직원으로서 재회하는 이야기로,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무덤덤하고 견고하게 벽을 세운 듯 행동하는 심청순 때문에 오히려 현공현이 더 애쓰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제발 부탁이니 그만하길 바랐다. 너는 나를 충분히 흔들었다.

"이제..그만..하세요."
"뭘 그만할까요."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전 사장님의 호기심을 채워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현공현이 황망한 웃음을 흘렸다.

"심 매니저는 호기심에 남자 발을 닦아줄 사람을 알고 있나 보군요."
"어째서..."
"당신이 내 수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청순은 본인의 짝사랑이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인지 더 냉정하게 대처하며 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다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데, 공현은 모두 한 번에 되찾고야 말겠다며 대학 시절처럼 모호하게 굴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사장과 직원이다 보니 청순은 어쩔 수 없이 공현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 이어지는데, 흡연실에서 마주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가세요 제주도. 앞으로도 계속 제주도에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뉴욕 지사로 가고 싶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오면 그만이니까.

 

일을 그만둘 수도 없으니, 그를 피하고자 제주도 발령을 지원하지만 공현은 어떻게든 그를 보러 쫓아오는 이런 부분들. 일로는 상당히 카리스마 있는 사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청순과 관련된 제주도에서의 모습들은 공과 사를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보였다. 

현공현이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타지 않으려는 청순을 억지로 끌어당겨 태운 뒤 폭풍 키스하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함.☻

이때부터 물꼬가 트인 듯 이후부터 공현이 청순에게 아주아주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2부 부터는 청순의 시점 뿐 아니라, 중간에 현공현의 시점이 한 두 번 씩 나오면서, 독자 입장에서도 늘 불분명했던 현공현의 심리가 해답지처럼 읽히는데,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누군가의 사랑 때문에 억지로 떠맡게 된 것과 정해진 길을 가야하고. 고작 사랑이라며 비웃었더니 자신도 그런 사랑에 빠져버리고.. 

그 알쏭 달쏭했던 행동은 갑자기 나타난 사랑에 방황하던 것이었을 뿐, 청순을 향한 현공현의 오랜 순정이 느껴져서 종종 나오는 현공현 시점이 참 좋았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오는 공현에게 흔들리다 부러질 수는 없다며 독하게 마음 먹고 일도 관두고 공현과의 추억이 담긴 것들을 정리하는 냉정한 청순이. 얘는 속내는 애틋한데 행동은 좀 독한 구석이 있다.

그러다 하나의 흔적으로 10년 전 공현의 진심을 알아버린 청순이 결국 무너지고 오열할 때는 정말... ( ´༎ຶㅂ༎ຶ`)

10년 전에도 울지 않았던 청순인데 흡...

 

그 시절, 공현은 청순이 고아인 것도, 그래서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지도 몰랐고, 청순은 공현이 무엇을 포기한 것인지, 왜 떠나야 했던 것인지를 몰랐던 것. 서로에게 힘든 부분을 감추었기에 서로의 어려움을 몰랐던 두 사람은 사실을 알고나서 서로의 대해 조금씩 이해하고 후회를 한다.


3부 '머물다' 

그렇게 서로 다시 알아가기 시작하는 둘이 서른 두 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내용들.

동갑내기 동창인 두 사람이 대학 시절에는 반말이던 대화가 일과 관련된 영역에서의 재회라 그런지 둘은 존댓말로만 대화를 나누는데 이게 은근히 치인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장과 직원이다 보니 실수할 수 있다고 일부러 쓴다는 설정인데 이게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하면서도 또 특별한 느낌도 들고. 어쩐지 야한 구석도 있다. 

야한구석이 뭔가 하면. 왠지 순수한 로맨스일 것 같은 애들이지만 연애의 시작이 농후한 때여서 그런지 둘이 만나기만 하면 불붙어서는 꽤 농염하게 군달까. 승마하러 갔을 때의 장면은 정말 좋았음.*^^*

 

거기다 공현이 청순을 어릴 때 애칭인 [청승이] 라고 부르며 종종 반말을 쓰는 장면들은 넘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한다는 게 느껴지는데, 이런 대화의 장치가 씬에서 또 빛난다. 특히 공의 눈으로 보면서 서술되는 게 뭔가 더 야하다. 독자에게도 늘 단정한 느낌이던 청순이가 특히. 거기다 공현이 청순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끼는 지도 잘 보여서 좋고.

 

다른 얘기지만 현공현이 대놓고 공사구분 안 하는 것도 은근히 웃겼다. 둘이 바디토크한 다음 날, 현공현이 촬영장 참관 중인 청순에게 도넛 방석 사다 준 장면은 정말ㅋㅋㅋ또 청순이 목에 자국 보이는 거 가지고 [애인이 열정적인가 봅니다] 라며 사람들 들으라는 듯 은근히 티 내는 건 얘 좀 주책이다 싶을 정도였음. 공현이도 이 동네 참사랑 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잘 지내며 연애를 해도 홀로 지내온 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청순은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있고, 가진 것이 많은 공현은 자신으로 인해 잃을 것도 많을 것이라는 압박감과 공현 모친의 등장에 약간의 추가 삽질을 한다.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현이 뭔가 잃는 것도 싫은 청순이 대책으로 내놓은 방안은 내가 현공현이라도 좀 어이없긴 했을 듯. 암만 예뻐죽겠는 애인이라도 바보 같은 소리하면 화가나죠...

 

아직도 외사랑같이 구는 청순을 보며 여전히 자신의 마음이 다 전해지지 않은 것을 깨달은 현공현이 우리 사랑이 그렇게 싸구려냐면서 화를 내는데 어찌 보면 연인 사이의 첫 다툼 같아서 기특하게 생각된 부분이다. 해소도 잘하고 바디토크까지 이어지는 것도 좋았고.(´ڡ`ლ)

 

또한 이야기 내내 비밀과도 같았던 청순의 날개뼈 문신이 마지막이 되어서야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데 공현이 문신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주는 장면이나 10년만에 다시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 것도 감동...T^T

알고 보니 이렇게나 뼛속까지 로맨티시스트였던 현공현인데 오랜 유학생활이 얼마나 인고의 시간이었겠나 싶다. 

어떻게 참았대....  

 

나는 네게 더 많은 곡들을 들려줘야했다.
그럼 너는 나를 잊지 못하겠지. 

지나가다 익숙한 선율이 들릴 때면 멈춰서 나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 역시 너를 떠올리겠지.
함께했던 시간만큼 더한 그리움에 사무치겠지.



결국, 가장 빈곤한 영혼을 가진 자는 바로 나였다. 
나는 고작 내 삶에, 겨우 찾아온 사랑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외전으로 잠깐 나오는 공현의 유학 시절 에피소드는 정말 찌르르...(ಥ_ಥ)

대학 시절 청순에게 곡들을 들려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곧잘 해주던 현공현이 더 많은 곡을 들려줘서 나를 잊지 못하게 할 걸, 들을 때마다 내 생각했으면 하는 속내라든가 청순이 준 담배를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갖고 있는 거라든가.

현공현의 공허함은 그냥 심청순의 부재였구나 싶게 청순의 짝사랑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현공현의 순정으로 마무리된 듯한구성도 좋았다. 

 

그리고 작가님의 직업군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조사랄까 탄탄한 구성 또한 작품의 장점으로 허투루 나온 부분이 없다. 배경이 되는 호텔 관련 사업이나 업무가 대충 그려지지 않고 자세하게 서술되어서 주인공수가 무늬만 사장과 호텔리어가 아니게 느껴지는 덕분에 캐릭터의 매력이 더 돋보였다고 생각된다.

덧붙여 약간의 월드관도 들어있어서, 블레이즈아웃의 캐릭터와 이후 작품이긴해도 반칙의 텍스 사가 살짝 등장하기도. 없어도 그만이긴 한 소재지만, 개인적으로 이렇게 연결되는 소소한 재미도 나쁘지 않았음.

 

아무튼, 키워드는 짝사랑 or 후회물이지만 그냥 타이밍을 놓친 것뿐, 서로 많이 사랑했던 애들이 좀 오래 삽질하다 뒤늦게 연애하는 이야기로 공현이나 청순이나 서로가 첫사랑이고 첫 연애인 애들이었다는 것. 

땅 파는 게 싫다면 별로겠지만, 분위기 타고 싶을 때나 애틋함을 느끼고 싶을 때는 재탕하게 되는 작품이다.

 

너도 나와 같은 열병을 겪었다는 것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방부제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너의 봄이었고, 너 역시 나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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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당신이 보는 나는 어땠습니까."
이번엔 그가 물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고작 사랑."

02
나는 여전히 네게서 확신을 얻고 싶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내 마음처럼.

"자꾸만 욕심을 부리고 싶어지네요."
..... 현공현은 뜻하던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만족감을 내비쳤다.

"우리는 그간 너무 검소했죠. 10년이나."